다시 해자!
거실 TV 밑에 놓인 콘솔을 한번 떠올려 보세요. 큰돈 주고 샀으니 분명 내 물건인데, 그 안에서 무엇을 돌릴 수 있는지는 제조사가 정해 놓은 목록에 달려 있죠. 내 집인데 가구 배치는 건설사가 허락해야 하는 느낌이랄까요. 오랫동안 우리는 그걸 당연하게 여겨 왔어요.
그런데 요즘 이상한 일이 연달아 벌어지고 있어요. 닫혀 있던 벽은 한쪽에서 AI 덕분에 힘없이 낮아지고, 다른 쪽에서는 그 벽을 대신할 훨씬 깊고 넓은 해자(Moat)가 파이고 있거든요. 게임기, 증권신고서, 데이터센터, 그래픽카드, 일자리, 워싱턴 정가까지. 서로 상관없어 보이던 이야기들이 하나의 질문으로 모여요.
벽은 누구를 지키고, 해자는 누구를 가두는가. 오늘은 이 질문을 들고 일곱 군데를 차례로 걸어 보려고 해요.
내 콘솔!
콘솔 시장의 역사는 한마디로 성벽을 쌓는 쪽과 넘는 쪽의 술래잡기였어요. 플랫폼 홀더(Platform Holder)는 하드웨어를 단단히 쥐어야 라이선스 수익과 독점 유통망을 지킬 수 있고, 해커들은 기기의 잠재력을 시험하며 허점을 파고들었죠. 여기까지는 익숙한 구도예요. 그런데 이번엔 판이 달라졌어요.
닌텐도(Nintendo)의 차세대 콘솔 스위치 2(Switch 2)에서 초기 탈옥이 터졌어요. 출발점은 스마일베이직(SmileBASIC)이라는 응용 프로그램이었고, 시스템 메모리와 파일 시스템을 과부하 상태로 몰아가 핵심 바이너리 영역까지 접근하는 데 성공했다고 해요. 정말 눈여겨볼 건 그다음이에요.
취약점을 찾는 과정에서 LLM을 비롯한 생성형 AI가 핵심 조력자로 활약했거든요. 인간 해커들이 풀지 못하던 복잡한 조작 절차를 AI가 분석해 공격 경로를 제시한 거예요. 지치지 않는 조수가 밤새 담장의 벽돌을 하나하나 두드려 보는 장면을 상상해 보세요. 제조사가 곧 패치를 내놓겠지만, 방어자가 쉽게 따라잡을 속도가 아니라는 우려는 이미 현장에서 입증된 셈이에요.
플레이스테이션 5(PlayStation 5) 쪽에서는 탈옥의 목적 자체가 달라지고 있어요. 오픈소스 프로젝트 플레이든(Playden)은 복제 게임을 돌리려는 도구가 아니에요. 탈옥한 기기에서 내가 가진 정품 스팀(Steam) 라이브러리를 연동해 윈도우 기반 PC 게임을 실행하게 해 주는 시도예요.
와인(Wine) 기반의 변환 계층 덕에 인디 게임부터 사이버펑크 2077(Cyberpunk 2077), 바이오하자드 RE:4(Resident Evil 4) 같은 대작까지, 플레이스테이션이 일종의 스팀 머신(Steam Machine)으로 변신하죠. 계정 보안 위험과 시스템 불안정은 분명 따라오지만, 이건 '내가 산 하드웨어를 온전히 쓰고 싶다'는 마음이 구체적인 코드가 된 결과예요.
두 사건을 겹쳐 보면 콘솔의 구조적 모순이 선명해져요. 기술적으로는 고성능 범용 컴퓨터인데, 비즈니스 모델은 여전히 '닫힌 정원(Walled Garden)'에 기대고 있거든요. 해킹의 얼굴도 바뀌었어요.
예전엔 불법 복제의 그림자가 짙었다면, 이젠 산 물건을 마음껏 확장하겠다는 소비자 권리 쪽으로 무게가 옮겨 가고 있어요. 벽을 높이는 비용은 늘어나는데, 벽을 두드리는 도구는 갈수록 싸지고 있다는 이야기죠.
둠즈데이 상장!
기업공개(IPO, Initial Public Offering)를 앞둔 회사의 증권신고서(S-1)는 원래 가장 낙관적인 문서예요.
시장은 한없이 크고, 우리 기술은 독보적이고, 투자하시면 큰 보상이 따릅니다.
위험 요인(Risk Factors) 항목도 경기 침체나 공급망 차질 같은 정형화된 면책 문구로 채우는 게 월스트리트(Wall Street)의 오랜 관행이었죠.
그런데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Securities and Exchange Commission)에 제출된 앤트로픽의 신고서는 그 문법을 깨 버렸어요. 막대한 자금을 모아 더 큰 AI를 만들겠다는 포부 바로 옆에, 자사 기술이 '인류의 멸망'이나 '사회에 대한 파국적·실존적 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가 나란히 적혀 있거든요.
정렬 실패,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자기 보존 행동', 인간이 따라잡지 못하는 속도로 움직이는 자율 에이전트(Autonomous Agent)까지, 법률 문서의 옷을 입은 SF가 펼쳐져요.
프런티어 모델 미토스(Mythos)의 사이버 취약점 발견 능력이 걱정돼 대중 공개를 제한하고 일부 조직에만 제공했던 일, 모델 가중치 유출을 막으려 보안을 강화하느라 신규 모델의 사전 학습을 한 달 넘게 멈췄던 일도 구체적인 위험 사례로 들어 있고요.
지배구조는 더 독특해요. 앤트로픽은 공익법인(PBC, Public Benefit Corporation)이고, 이사회 과반을 좌우하는 장기이익신탁(LTBT, Long-Term Benefit Trust)과 특수 주식(Class T)을 통해 안전이 수익과 충돌하면 주주 이익을 희생할 수 있다고 못 박아 뒀어요.
헌법(Claude's Constitution)과 책임 있는 확장 정책(RSP, Responsible Scaling Policy)을 지키기 위해 출시를 미루거나 개발을 멈출 권리까지 문서에 적어 둔 거예요. 돈은 월스트리트에서 받되, 그 돈을 낸 사람들의 통제권에는 스스로 벽을 친 셈이죠.
물론 이걸 순수한 윤리적 고뇌로만 읽기는 어려워요. 냉정하게 보면 이 문서는 해자를 파는 설계도이기도 하거든요. 우리 제품이 문명을 흔들 만큼 강력하다는 경고는, 뒤집으면 가장 강렬한 기술 자랑이 돼요.
파국적 위험이 공식화될수록 엄격한 규제가 따라오고, 막대한 안전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는 후발 주자는 입구에서 걸러지죠. 공포를 다룰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제(司祭)로 스스로를 세우는 효과도 있고요. 진심이냐 전략이냐를 가르기는 어려워요.
다만 분명한 건, 가속페달과 브레이크를 동시에 밟는 이 이중성이 지금 AI 산업의 자화상이라는 거예요.
해자 2개!
앤트로픽이 말과 구조로 해자를 판다면, 구글(Google)은 속도로 파고 있어요. 한동안 거대 기업은 신중함 때문에 느리다는 말을 들었잖아요. 2026년 10월 말, 구글과 구글 딥마인드(Google DeepMind)가 연달아 내놓은 결과물은 그 평가를 뒤집었어요.
2주 전 공개한 제미나이 4 아르곤(Gemini 4 Argon)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최상위 모델 제미나이 4 카본(Gemini 4 Carbon)을 선보였고, 차세대 세계 시뮬레이션 모델 지니 4(Genie 4)까지 얹었거든요.
대중의 눈을 먼저 사로잡은 건 지니 4예요. 물리 법칙과 공기역학, 자연스러운 캐릭터 반응, 실시간 대화와 배경음까지 네이티브 멀티모달(Native Multimodal)로 구현했어요. 그런데 진짜 흥미로운 건 화려함 아래 깔린 구조예요.
복잡한 다단계 사건을 일관되게 끌고 가기 위해 제미나이 3.8 플래시(Gemini 3.8 Flash)와 제미나이 4 아르곤이 백그라운드 추론 엔진으로 맞물려 돌아가는 하이브리드 구조거든요. 픽셀로 세계를 그리는 쪽과 인과를 설계하는 파운데이션 모델(Foundation Model)이 한 몸이 되면서, 시뮬레이션은 구경거리를 넘어 로보틱스와 에이전트 훈련을 위한 인프라로 올라서요.
그 지능의 본체가 카본이에요. 아티피셜 애널리시스(Artificial Analysis) 인텔리전스 인덱스(Intelligence Index) v5.0에서 59점을 기록하며 1위를 되찾았죠.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 사이버 보안, 장기 실행(Long-horizon) 에이전트 역량이 특히 눈에 띄는데, 취약점 탐지 88.2%, 익스플로잇 검증 54.8%, 근본 원인 패치 71.0%라는 수치가 보안 전 주기에 걸쳐 나왔어요. 며칠 동안 맥락을 잃지 않고 방대한 코드베이스를 오가며 결함을 찾아 고치는 지속력도 인상적이고요.
더 눈길이 가는 건 이 능력을 안전과 정렬(Alignment)을 챙기면서 얻었다고 강조한다는 점이에요. 까다로운 환경에서도 편법 없이 정확도를 높였고, 내부 환경의 고위험 불일치 경고는 80% 가까이 줄였어요.
모호한 상황에선 멋대로 추측하는 대신 사용자에게 먼저 묻고, 간접 프롬프트 주입(Prompt Injection) 공격을 막고, 근거 없는 주장도 절반으로 줄였다고 해요. 가격은 아르곤과 같게 유지해 생태계 장악력까지 챙기는 치밀함도 보이고요.
그래서 이 장면은 앞의 이야기와 좋은 대조가 돼요. 같은 해자라도 앤트로픽은 경고와 구조로, 구글은 속도와 완성도와 가격으로 팠잖아요. 이제 구글은 추격자가 아니라 프런티어 랩(Frontier Lab)의 기준점으로 돌아왔어요. 다만 속도로 판 해자는 누가 더 빨리 달리느냐에 따라 금세 메워지기도 하죠.
모래 위에 쌓은 탑
해자가 깊을수록 그 아래에는 엄청난 비용이 묻혀 있어요. 최근 일론 머스크(Elon Musk)와 투자자 차마스 팔리하피티야(Chamath Palihapitiya)가 나눈 대화는 그 비용의 그늘을 보여 줘요.
머스크가 언급한 '미완성 데이터센터에 묶여 놀고 있는 연산력(Stranded Compute)'은 단순한 공기 지연이 아니라, 자본과 전력과 관료주의가 뒤엉킨 복합 위기의 서막이에요.
병목은 양쪽에 있어요. 차마스가 짚은 대로 틈새를 노린 네오클라우드(Neocloud)들은 자본력이 약하고 체계가 허술해요. 반대로 거대 하이퍼스케일러(Hyperscaler)는 둔중한 관료주의와 복잡한 계약 절차 때문에 전력과 부지를 확보하는 속도전에서 밀리고요.
2027년쯤 공사 지연이 본격화되면, 큰돈 들여 사 온 GPU가 전기를 받지 못해 멈춘 채 자본비용조차 건지지 못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어요. 공급이 막히면 빅테크(Big Tech)는 외부 모델 개발사를 뒤로 미루고 자사 수요부터 채울 테니, 독자 인프라가 없는 AI 스타트업이 가장 먼저 흔들리겠죠.
금융 시장도 식고 있어요. 머스크의 설명으로는 채권 시장이 데이터센터 말고 뚜렷한 자체 매출원이 없는 기업에는 사실상 돈줄을 닫았어요. 스타링크(Starlink)나 발사체 사업처럼 현금을 꾸준히 만들어 내는 본업이 있어야 수백억 달러의 빚을 내 GPU를 살 수 있다는 거예요.
머스크가 이끄는 SpaceXSI처럼 그런 현금 창출원을 쥔 쪽은 버틸 수 있겠지만, 자금줄이 마른 200여 개의 신생 네오클라우드는 대규모 파산이나 흡수합병이라는 구조조정을 피하기 어려워요.
여기서 해자의 역설이 보여요. 지금 AI 경쟁에서 해자는 모델 성능만이 아니라 전기와 현금이에요. 칩을 얼마나 사 모았느냐를 넘어, 전력을 빨리 확보하는 기동성, 큰 규모를 빨리 짓는 실행력, 외부 투자 없이도 버티는 본업의 완충지대까지 갖춘 소수만 남을 거예요.
모래 위에 쌓은 탑은 높이를 자랑하다가도 파도 한 번에 주저앉는다고 하잖아요. 그 파도가 2027년쯤 온다는 이야기예요.

게이머의 방이 비워지는 동안
모래탑의 파편은 엉뚱한 곳으로 튀어요. 게이머의 책상 위로요. 엔비디아(NVIDIA)의 최상위 플래그십 지포스 RTX 5090(GeForce RTX 5090)의 국내 유통가가 한 달 새 40% 넘게 뛰어 1,300만 원 선을 돌파했어요. 암호화폐 열풍 때의 악몽이 더 크고 정교한 모양으로 돌아온 거예요.
홍콩 매체가 공개한 중국 현지 작업장 영상이 그 배경을 보여 줘요. 허름한 수리점이 아니라 체계적인 소규모 제조 라인에서, 브랜드와 파운더스 에디션(Founders Edition)을 가리지 않고 수백 장의 RTX 5090이 분해되고 있었어요.
작업자들은 핵심 부품인 GB202 GPU와 고대역폭 메모리를 능숙하게 떼어 내 서버 규격 기판과 블로어(Blower) 냉각 장치에 옮겨 심어요.
미국이 고성능 반도체의 대중국 수출 통제를 강화하고 엔비디아가 성능을 깎은 중국 전용 모델을 내놓았는데도, 완제품 밀반입과 우회 수입을 통해 게이밍 GPU가 AI 데이터센터용 연산 카드로 둔갑하고 있는 거죠. 수출 통제라는 벽에 구멍이 숭숭 난 장면이에요.
여기에 수급 불균형이 겹쳐요. PC 시장 전체가 침체인데도 외장 GPU 출하량만 기형적으로 늘어 '큰손의 싹쓸이' 정황이 뚜렷했고, 엔비디아가 RTX 5090에 이어 주력 라인업인 RTX 5080 16GB 생산까지 중단했어요.
예전 채굴 대란 때는 채굴 효율만 골라 낮추는 LHR(Lite Hash Rate) 기술로 숨통을 틔웠지만, 이번엔 같은 처방이 통하지 않아요.
RTX 50 시리즈의 DLSS(Deep Learning Super Sampling), 프레임 생성, 신경망 렌더링 같은 핵심 게이밍 기술이 AI 연산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 AI 성능을 깎으면 게임 성능도 같이 무너지거든요. 같은 칩이 두 얼굴을 가졌으니 하나만 막을 수가 없는 거예요.
청구서는 결국 평범한 소비자에게 도착해요. 엔비디아를 지금 자리에 올려 준 충실한 게이머들이 정작 기술 잔치에서 가장 먼저 밀려나는 모습은 씁쓸해요. 앞서 콘솔 이용자들이 벽을 넘어 자유를 찾아 나서던 장면과 겹쳐 보이는 건 저만일까요?
한쪽에서는 사용자가 벽을 넘고, 다른 쪽에서는 사용자가 벽 바깥으로 밀려나고 있어요. 벽 하나가 낮아질 때 다른 벽은 높아지고, 그 틈에 낀 사람들이 계산서를 받아 드는 셈이에요.
노동이라는 마지막 울타리
가장 오래된 울타리는 아마 '똑똑한 건 인간뿐'이라는 믿음일 거예요. MS 창업자 빌 게이츠(Bill Gates)는 영국 옵서버(The Observer)와의 인터뷰에서 AI의 등장을 유인원에서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로 넘어간 것에 비견되는 '진화적 사건'이라고 불렀어요.
지구에서 가장 똑똑한 존재라는 개념 자체가 다시 정의되고 있다는 말이에요. 10대 때부터 코딩에 몰두했던 그조차 자신의 프로그래밍 실력이 쓸모없어졌다고 털어놓았대요. 첨단 연구, 소프트웨어 개발, 사무직의 핵심 역량에서 휴머노이드(Humanoid) 로봇이 하는 육체노동까지, 쌓아 온 노동의 가치가 한꺼번에 흔들리고 있어요.
진짜 문제는 기술의 속도가 아니라 그걸 받아 내는 시스템이에요. 게이츠가 짚었듯 지금의 시장은 '로봇을 고용하고 사람을 내보내라'는 신호에 보상을 주는 구조거든요. 기업이 인간 노동을 기계로 바꿔 지구 전체의 번영 총량을 키운다 해도, 노동 소득세와 고용 기반 세수가 줄면 실직자를 돕고 재교육할 사회 안전망의 재원이 마르는 역설이 생겨요. 부는 한쪽으로 쏠리고 평범한 노동자는 벼랑 끝으로 밀리는 함정이죠.
해법도 거칠지만 현실적이에요. 게이츠는 LLM 기업이 판매하는 AI 사용 단위에 매기는 '토큰세(Token Tax)'를 제안하고, 초부유층에 대한 과감한 증세를 촉구했어요.
평생 140억 달러의 세금을 낸 그가 기꺼이 400억 달러까지 낼 수 있다고 한 건, 파격적인 분배 없이는 자본주의 자체가 버티기 어렵다는 위기감의 표현이에요. 특정 영역의 일자리를 사람에게만 보장하는 '인간 전용 일자리' 구상도 거론돼요.
그런데 경제보다 더 아픈 질문이 남아요. 수천 년 동안 우리는 결핍을 메우는 노동 속에서 보람과 존재 이유를 찾아 왔잖아요. 기계가 부족함을 모두 채워 준다면 무엇으로 삶의 의미를 얻을까요?
게이츠가 현대 기술 문명과 거리를 둔 채 사는 아미시(Amish) 공동체를 떠올렸다는 대목은 의미심장해요. 일부러 울타리를 치고 자기만의 속도를 지키며 사는 사람들이, 가장 앞선 기술을 만든 사람의 상상 속에 등장하니까요.
제발 입 좀 다물라
벽이 낮아지고 해자가 깊어지는 소동을 가장 피곤하게 지켜보는 곳은 워싱턴이에요. 백악관(White House)과 의회 지도자들 사이에서 AI 기업 수장들을 향해 '제발 입을 다물고 안전하게 제품이나 만들라'는 격앙된 반응이 나오고 있대요.
한쪽에서는 질병 퇴치와 무한한 번영을 약속하고, 다른 쪽에서는 디지털 자의식과 인류 멸종을 경쟁하듯 설파하니까요. 유토피아와 파멸론을 오가는 말은 합리적인 정책을 세우기 어렵게 만들고, 유권자의 일자리와 아이들의 안전을 걱정해야 하는 정치인에게는 현실 감각을 잃은 엘리트의 위험한 불장난으로 보여요.
신뢰가 깎인 데는 기업들의 서투른 계산도 한몫했어요. OpenAI와 앤트로픽 등은 IPO를 앞두고 주말 심야에 불리한 보안 사고를 공개하거나, 주 정부의 강한 규제를 무력화할 연방 법안 로비를 벌였어요.
대형 참사의 기준을 사망자 50명 이상으로 정의하려던 기이한 시도도 있었고, 백악관 회동 직후에야 정부 시스템과 연관된 모델 취약점을 보고한 일도 있었죠. 정치권이 종말론 경고를 진심 어린 호소보다 독점적 지위를 지키고 규제를 무디게 만들려는 공포 마케팅으로 의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에요. 앞서 본 해자 이야기와 겹치는 대목이고, 한 번 깎인 신뢰는 보고서 몇 장으로 되돌리기 어렵거든요.
하지만 피로감이 위협 자체를 지워 주진 않아요. 게이츠는 AI가 스스로 학습하며 성능을 끌어올리는 재귀적 자기개선(RSI, Recursive Self-Improvement)을 거쳐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는 정렬 실패 문제가 3~4년 안에 현실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어요.
바이오 테러와 대규모 사이버 공격의 위험은 이미 국경 너머에서 가시화되고 있고요. 영국이 세계 최초로 AI 바이오 안보 랩을 세우고 국가 사이버 방패와 AI 안보 연구소에 공적 자금을 투입한 건, 말싸움 대신 실질적인 억제력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이에요. 게이츠는 미국과 중국이 AI 안전을 패권 다툼의 승패가 아닌 인류 전체의 생존 과제로 보고 공조해야 한다고도 지적했어요.
누구를 위한 해자
일곱 군데를 돌아다니며 벽과 해자를 살펴봤어요. 콘솔의 벽은 AI라는 도구 앞에서 낮아지고 있고, 수출 통제의 벽에도 구멍이 났어요. 그 대신 앤트로픽은 공포와 지배구조로, 구글은 속도와 완성도로, 인프라를 쥔 쪽은 전기와 현금으로 새 해자를 파고 있죠. 그 사이에서 게이머는 벽 밖으로 밀리고, 노동자는 울타리 없는 들판에 서고, 워싱턴은 누구 말을 믿어야 할지 몰라 지쳐 가요.
흥미로운 건 벽과 해자가 늘 '지키는 도구'이면서 동시에 '가두는 도구'라는 점이에요. 닫힌 정원은 이용자를 보호한다고 말하지만 이용자를 가두고, 안전을 앞세운 해자는 인류를 지킨다고 말하지만 후발 주자를 걸러 내요. 그렇다고 벽이 모조리 허물어지는 세상이 좋기만 한 것도 아니에요.
보안의 성벽이 낮아지면 바이오 테러와 사이버 공격의 문턱도 함께 낮아지니까요. 그러니 질문은 '벽을 허물까, 세울까'가 아니라 '이 벽은 누가 세웠고, 지금 누구를 지키고 있나'에 가까워요.
에코 멤버님들이 지금 서 있는 곳의 벽을 한번 떠올려 보세요. 내 일터, 내가 쓰는 서비스, 내가 내는 세금과 구독료까지요. 그 벽 안쪽에 있다면 무엇을 얻고 있고, 바깥쪽이라면 어떤 청구서를 받고 있나요? 답은 사람마다, 벽마다 다를 거예요. 다만 그 벽 앞에서 한 번쯤은 멈춰 서서 물어봤으면 해요. 문은 어디에 있고, 열쇠는 누구 손에 있느냐고요.

Cinnamomo di Moscata (글쓴이) 소개
예비 파운더 / AI 아키텍트입니다. https://www.instagram.com/cinnamomo_di_moscata/
[1] Alicia Haddick. (2026). Hackers Begin Dumping Nintendo Switch 2 Games As Expanded Exploit Breaks Console Security. Kotaku. https://kotaku.com/hackers-begin-dumping-nintendo-switch-2-games-as-expanded-exploit-breaks-console-security-2000749440
[2] Alessio Palumbo. (2026). Playden Turns Jailbroken PS5 Consoles Into Steam Machines, With Cyberpunk 2077, Resident Evil 4, and Many More Windows Games. wccftech. https://wccftech.com/playden-jailbroken-ps5-steam-machines-cyberpunk-2077-resident-evil-4-windows-games/
[3] Anthropic, PBC. (2026). FORM S-1 REGISTRATION STATEMENT. United States Securities and Exchange Commision. https://www.sec.gov/Archives/edgar/data/2130357/000162828026067168/anthropicpbc-sx1.htm
[4] Raia Hadsell, Diego Rivas and Hang Qi. (2026). Genie 4: A new generation of world simulation. Google DeepMind. https://deepmind.google/blog/genie-4-a-new-generation-of-world-simulation/
[5] Koray Kavukcuoglu. (2026). Gemini 4 Carbon: our next frontier model. News from Google. https://blog.google/innovation-and-ai/models-and-research/gemini-models/introducing-gemini-4-carbon/
[6] Elon Musk. (2026). "@Yuchenj_UW I think we're going to see a lot of stranded compute in partially complete data centers". X. https://x.com/elonmusk/status/2114168277882581486
[7] 권봉석. (2026). "게임용 지포스 RTX 5090, 중국서 AI 가속기로 둔갑". ZDNet Korea. https://zdnet.co.kr/view/?no=20261027141541
[8] Ben Zaranko, James Harding. (2026). Bill Gates warns the ‘evolutionary’ age of AI will be brutal for workers. The Observer. https://observer.co.uk/news/technology/article/bill-gates-warns-the-evolutionary-age-of-ai-will-be-brutal-for-workers
[9] James Harding, Tom Pilston. (2026). Bill Gates: humanity will no longer be the highest form of intelligence. The Observer. https://observer.co.uk/news/observer-walk/article/bill-gates-humanity-will-no-longer-be-the-highest-form-of-intelligence
[10] Maria Curi. (2026). Washington's message to AI execs: Please shut up. Axios. https://www.axios.com/2026/10/24/ai-ceos-washington-political-liability
